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.7 긴급회의 (문단 편집) == 이후 == 마오쩌둥은 총서기가 된 취추바이로부터 상하이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았다. 하지만 모든 당 간부들이 지방으로 가는 것을 꺼리는 와중에 마오쩌둥은 이를 거절했다. >"나는 큰 도시로 나가 높은 빌딩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. 시골로 가서 산에 올라 녹림 친구들을 사귀고 싶습니다." 8월 9일 취추바이는 마오쩌둥을 중앙위원회 특별대표로 호남에 파견하여 [[추수폭동]]을 준비하게 했다. 1927년 9월 9일 추수폭동이 거행되었으나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. 취추바이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11월 상하이 확대회의를 통해 연속혁명론을 주장, 12월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으나 장타이레이가 사망하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공산당원은 80% 이상이 격감하는 피해를 입고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된다. 다만 호남에서의 폭동을 지휘하다가 패주한 마오쩌둥은 정강산을 점거, [[정강산 투쟁]]을 전개하면서 [[홍군]] 건설의 기반을 닦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